세마불패(細馬不敗)
이종건/자문위원·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
올해도 며칠 안 남았다. 다가오는 2012년은 임진년으로 십이간지 중 용띠의 해이다. 특히 내년은 검은색을 나타내는 ‘임(壬)’과 용을 뜻하는 ‘진(辰)’이 만나 60년에 한 번 돌아오는 흑룡의 해라고 한다. 용은 비와 바람을 몰고 다닌다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회복기미가 시원치 않은 글로벌 경제에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까 걱정스럽다.
연말이 되면 으레 기업, 정부 등 경제주체들은 신년 사업계획이나 경제운영방향의 큰 그림을 구상하면서 새해를 맞이한다. 항상 총론보다는 각론이 문제다. 추상적인 기본방향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으나 세부방안에 들어가면 컨텐트도 빈약하고 구체성도 떨어진다. 설사 완벽한 액션플랜을 세워놓고도 막상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곳에서 실족하여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악마는 눈에 잘 띄는 밝은 곳보다는 존재감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 마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뒤집고 들어갈 틈이 많은 허술한 곳이 바로 악마의 놀이터이다.
얼마 전 애틀랜타 지역 연준에서 내년 봄에 열리는 컨퍼런스 참석 초청장이 왔다. 이번 회의 주제는 “Financial Reform: The Devil’s In the Details”로 잡혔다. 그 동안 금융개혁과 관련하여 거대담론(총론)은 충분히 논의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개혁 프로그램의 성공여부를 좌우하는 세부방안(각론)을 실행하는 데 중지를 모아보자는 취지다.
원래 ‘The Devil is in the Details‘라는 표현은 ‘God is in the Detail’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경각심을 환기시키려고 디테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신에서 악마로 대체된 것 같다. 일을 훼방하는 악마만 디테일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도와주는 신도 거기에 있다. 위기와 기회 모두 디테일 속에 공존한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막판 실수를 경계하는 ‘다 된 밥에 재 뿌리다’가 있다. 99%를 잘 하고도 마지막 1%를 방심하는 순간 악마는 어김없이 심술을 부린다. 1% 실수가 100% 실패를 초래한다. 마지막까지 사소한 것에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이유다.
대미를 장식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끝낼 때 화룡점정이라고 한다. 승천하는 멋진 용의 모습도 한 점에 불과한 눈동자가 디테일하게 그려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디테일의 핵심은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시켜 일의 집중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있다. 화룡점정의 마침표는 디테일의 ‘종결자‘라 할 수 있다.
요즘처럼 기업의 경영전략이나 제품성능이 경쟁업체와 별반 차이가 없는 시대에는 디테일에서 모든 승부가 난다. 디테일이야말로 일의 성패를 결정하는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내년처럼 글로벌 리스크와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는 ‘멀리 보려고 높게 나는 새’보다 ‘벌레를 잡기 위해 낮게 나는 새’의 자세가 필요하다. 디테일이 뒷받침되지 않는 큰 그림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사소한 디테일에도 꼼꼼하게 대처한다면 큰 성공은 보장 못해도 적어도 뼈아픈 실패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細馬不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