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며 산다. 소통은 말로 하는 대화가 주종을 이루지만, 대화 이외에도 눈짓, 손짓, 암시 등과 같은 비언어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소통을 한다. 그래서인지 오래 같이 산 부부들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 지 알고 그 일을 미리 해줌으로써 서로의 존재의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마음이 잘 통하는 부부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소통이 되지 않아 서로 스트레스를 주고, 관계의 단절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도 허다한 것 같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은 고금을 막론하고 세대 간의 문화와 의식의 차이로 인해 소통이 어려운 대표적 사례로 지적돼 왔다. 부모가 한창 자아의식이 형성되고 있는 사춘기의 자녀를 어린애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려고 하다 보면 자녀의 당연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아동학 또는 교육 전문가 들은 부모가 자녀와 소통을 하려면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은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하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중고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녀들이 주말에도 학원에 가서 밤 12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오는 현실에서 일주일에 자녀들과 저녁 한번 같이 먹기가 어렵다는 걸 잘 안다. 어떻게 해서 한 달에 한번이라도 자녀와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할라치면 화제는 당연히 입시 이야기, 공부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고, 결국 부모와 자식간의 소통이 아닌 부모의 일방적인 훈계 내지는 설교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또한 내 경험으로는 나이가 사십이 넘어가면 외부 지식을 받아들이는 눈, 귀 등 오감이 둔화되기 시작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그 동안의 경험에 의존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기원전에 사셨던 공자님도 나이 사십을 ‘불혹’ 이라고 규정하신 것이 아닐까? 어쨌든 자녀를 이해하고 소통을 하려면 침침해지는 오감을 예민하게 세워서 자녀들의 생각과 의견을 끝까지 경청해주는 인내심과 성의가 필요한 것 같다. 심리학자들이 애기하는 것처럼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고민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상당 부분 해소된다고 하지 않던가?
소통의 문제는 가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낮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도 여러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것 같다. 직장은 조직체이고, 조직에는 상하관계가 있으므로 소통이 오래 산 이심전심의 부부처럼 상하간에 잘 이루어지는 직장은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대외적, 대내적 업무를 처리할 수 있지만,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직장은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처럼 한 순간에 와해될 수도 있다. 직장 소통의 열쇠는 상사들의 소통 노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상사들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이가 사십 이상이 대부분으로 ‘불혹’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또한 기억력이 감퇴되면서 고유명사를 잊어 버리거나, 업무지시를 할 때 적정 용어 대신 “그것” 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질문을 할 때 주어와 목적어를 생략하고 동사만 말하는 바람에 눈치 빠른 부하직원이 아니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꿈벅꿈벅 하다가 이것이 쌓이고 쌓여 결국에는 조용히 책상을 빼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 6하원칙(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에 대해 잘 배웠고 시험에도 잘 나와서 빈출 문제로 표시해서 애써 암기했던 기억이 난다. 상사나 부하나 지시와 보고 시 6하원칙을 지켜주면 베스트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주어와 목적어는 정확하게 사용해야 기본적인 소통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지금 인터넷 및 스마트폰, 메신저, 카톡 등 소통 매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으나, 이러한 훌륭한 매체를 이용해서 얼마나 잘 소통 할 수 있는지는 정확한 언어 구사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끝/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중앙경제 종합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