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여름 태풍 아이린이 한바탕 뉴욕과 뉴저지 지역을 휩쓸고 지나가 강풍과 홍수로 피해를 본 적이 있다. 비도 많이 내렸고 바람도 워낙 세다 보니 여기저기에 나무 가지가 꺾여 있거나 제법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 채 뽑혀 있는 것이 보였다. 단순히 “바람이 무척 강했구나” 하고 생각이 들다가 “아무리 바람이 세다고 해도 이렇게 큰 나무가 허망하게 쓰러질 수 있나” 하는 의아 심이 들던 중 뽑혀 누워있는 나무의 뿌리를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뽑혀진 뿌리 부분이 나무의 크기에 비해 크게 적은 것이었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신장 2m가 넘는 200kg의 거구에 발목과 발은 갓난 아이의 것인 셈이다.
다시 들여다보니 뽑힌 부분이 마치 재단해 놓은 것처럼 반듯하고 흙 속에 묻혀있던 뿌리의 깊이도 얕을 뿐 아니라 직경도 1m 내외에 불과하였다. 크고 작은 나무에 상관없이 쓰러져 있는 나무마다 거의 마찬가지였다. 높이가 족히 10m 가량은 됨직한 커다란 나무도 실상 뽑힌 뿌리는 마찬가지 형편이었다. 겉 모습과는 달리 땅속에 있던 뿌리 부분도 아주 가늘어 나무가 반듯이 서있을 동안 혈관이 됐던 뿌리의 크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잔뿌리 수준 정도이다. 이렇게 작은 뿌리에 이렇게 큰 나무가 그 동안 버티고 서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마치 나무 젓가락 두 개에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라고나 해야 할까.
이유를 알고 나서는 이해가 됐다. 미국의 토양성분이 워낙 좋아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더라도 수분과 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어 뿌리가 크거나 깊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 나무는 고생도 안 하는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하루는 서울에서 온 손님과 태풍으로 고생하던 이야기 중에 여름에 있었던 뿌리 뽑힌 나무 말을 했더니 서울의 예를 전한다. 그분 댁 앞에 가볍게 등산할 만한, 높지 않은 산이 있어 주말이면 부부가 가벼운 산책을 다녀오곤 하는데,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바위자락에 조그마한 소나무들이 자라는데 보기에는 연약해 보여도 아무리 매서운 바람이 불고 눈비가 오더라도 끄떡 없어 쓰러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일단 소나무가 발아하여 뿌리를 뻗기 시작하면 생존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물을 찾아 바위틈의 저 깊숙한 곳까지 또는 바위 속으로까지 뿌리를 내리므로 뿌리의 길이도 길고 깊어 여간 해서는 뽑히거나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무의 성장 환경이나 토양이 너무 좋다고 해서 꼭 좋아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사는 이치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나무라면 둘 중에서 어떤 나무가 될 것인가. 어떤 나무이고 싶은가 생각해 본다. 냉혹한 현실이라는 거센 태풍이 몰아 칠 때 견디지 못하고 쉽게 뽑혀 버릴 것인가 아니면 소나무처럼 굳건하게 버티며 모진 비바람을 헤쳐 나아갈 것인가.
이렇게 보면 너무 쉽고 좋은 성장환경이나 조건을 바랄 것만도 아니다. 너무 좋은 환경에서만 성장하면 뿌리를 넓고 깊게 내리지 못해 평소에는 멀쩡하지만 조그마한 어려움에 직면하기라도 하면 휘청거리거나 뽑히기 쉽게 될 가능성이 많을 것이 아닌가. 오히려 지금은 비록 힘들고 고생스럽더라도 그런 어려운 상황을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아 바위 깊숙이 뿌리를 내리면 웬만한 태풍도 이겨 나가는 멋있는 소나무가 되지 않겠는가.
최근의 우리 사회에서 어려움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안타까운 경우를 자주 보고 듣게 된다. 청소년 시절에는 학교 성적, 친구 또는 이성문제 등, 성인이 돼서는 경제적인 문제 등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살아가면서 매일 새롭게 불어오는 문제의 태풍에 부닥치고 또 견디면서 나아가게 된다. 일부러 태풍을 불러 일으킬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태풍에 쉽게 쓰러져서도 안 될 일이다. 사람이 소나무보다 못해서야 될 일인가.
<나득수/이사·우리은행 뉴욕지점 본부장>